
프랑스의 역사 목록 Contents A. 고대 프랑스 1. 선사 시대의 켈트 골족의 정주 a. 켈트족 Celts골 Gaule족 b. 고대 로마의 갈리아 갈로 Gallo로마 로마 c. 프랭크 Frank B. 중세 프랑스 1. 프랭크 왕국 a. 멜로빙어(Mérovingiens) 왕조 1) 클로비스 개종 b. 칼로링거(Carolingiens) 왕조 1) 샤를 마뉴 Charlemagne (크리스마스 황제 대관)와 신성 로마 제국 2) 프랭크 왕국의 분열 2. 중세의 봉건 왕조 a. 카페(Capétiens) 왕조 1) 노르망디 공국과 정복왕 윌리엄의 영국 정복 2) 안주가와 잉글랜드 플란타 자넷 왕조 3) 루이 7세와 노트르담 대성당 4) 영국 사자왕 리처드와 현지왕 존 존 랙랜드 5) 존엄왕 필리프 2세 Philippe II Auguste와 그 자손 6) 성왕 루이 (상루이 Saint Louis, 루이 9세 Louise IX) 7) 미남왕 필리프 4세 Philippe IV와 아비뇽 유수 유수 8) 신전 기사단 Orden des Templiers(템플 기사단/사원 기사단) b. 발로와 왕조 C. 현대 프랑스 1. 부르봉 왕조 D.프랑스 대혁명(1789) 제2차 세계대전(1945) 1. 프랑스 대혁명(1789) 2. 제1제정 3. 부르봉 왕정 레트로 월 왕정 5. 제2공화국 6. 제2제정 7. 제3공화국 E.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 1. 제4공화국 2. 제5공화국(1958현재)
4%ED%8A%B8%EC%A1%B0%EC%95%BD
911년 가을의 단순왕 샤를 3세 Carolus Simplex, Charles III와 노르만족 로로 Rollo 사이에 묶인 조약이다. 로로는 바이킹족 출신의 노르만족으로서 네우스토리아를 침공했고, 당시 서부 프랭크 왕 샤를은 그들의 추가 침입을 막기 위해 노르망디에 정착하는 것을 허용했다. 로로는 샤를의 서녀 서녀와 결혼해 노르망디 공작이 되어 가톨릭으로 개종해 프랑스 왕의 가신이 되어 충성을 맹세했지만, 이때 그는 직접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왕의 발에 입을 맞추는 대신 그의 부하 중 한 명을 시켜 복종의 표시를 했다. 노르망디의 공적으로 영국의 왕이 된 윌리엄 1세는 정복왕으로서 절대적인 왕권을 가진 왕조의 참가자로서 영국을 정복하는데 조력한 가신들과 기사들에게 봉토와 농로를 분배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귀족들은 “영국은 노르망디구가 정복한 지역이므로 노르망디의 지배자가 자동으로 영국 왕이 된다”는 사고를 갖게 되어 분쟁의 화종은 점점 커지고 있다. a2) 안주가와 잉글랜드 플란타 자넷 왕조
한편, 노르망디의 남쪽을 영지로 소유하고 있던 프랑스 본토의 안주 Anjou 가문은 10세기 무렵부터 가세를 서서히 키워, 12세기 초에는 프랑스의 유력 가문으로 부상하게 된다. 윌리엄 1세의 3남인 영국 왕 헨리 1세 헨리 I는 형 로벨과의 권력 투쟁에 승리해 영국과 노르망디를 수중에 넣어 안주가와의 혼인을 통해 노르망디를 지키기 위해 3년 전 5인 딸 1 7)을 안주 백작 조후루아(조후루아 5세 지오프리 V, 제프리, 년)와 재혼시킨다(1128). 조플루아는 전투에 나올 때마다 금의 나머지 가지인 plantagenista를 헬름에 꽂아 가서 플란타 자넷 Plantagenet이라는 별명을 얻고 있었다. 그 후, 헨리 1세가 후사 없이 사망(1135)하고 그의 조카이고 마틸다의 사촌인 스티븐(블루아의 스티븐 Stephen of Blois, , 재위 ?/1154)이 마틸다 왕의 자리에 원을 올린 마틸다에서 아들 헨리 2세로 이어지는 안주강의 18년간 왕위 쟁탈전이 이어져 이 시기를 역사적으로는 무정부 시대라고 부른다. 결국 1153년 스티븐의 왕위를 인정하고 그의 아들 윌리엄에게 부르고뉴 백작 작위를 주는 대신, 마틸다의 아들 헨리(프랑스어 : 앙리 Henri)는 영국 왕위 상속자가 된다고 타협한 월링포드 조약 Treatty of Wallingford 그 후 1154년 스티븐이 사망하면 마틸다의 아들인 헨리 2세 헨리 II(, 재위 )가 왕위를 계승해 영국의 프란타자넷 왕조가 탄생하게 된다. 이로 인해 프랑스의 안주가가 정식으로 영국의 왕가로 등장하게 되고, 영국은 프랑스의 역사와 맞물리면서 유럽 대륙의 역사에 편입되어 일축을 이루게 된다.
8
반면 프랑스 왕의 권력은 여전히 약하며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고 있습니다. 프랑스왕 루이 7세 Louis VII(, 재위 )는 아키텐 공국과 포아티에 백작령의 상속녀 엘레오놀. 그 후, 엘레오놀은 노르망디 공작(마틸다 승계)이며, 안주 백작인 헨리·플랜타더넷과 재혼(1152)해, 그가 1154년에 영국 왕 헨리 II 1세 리처드 I생이 된다. 엘레오놀과의 혼인을 통해 아키텐 공국을 얻은 헨리 2세는 치세에서 브리트니 공국을 차지하고, 툴루즈 백국까지 점령하고, 그 결과 프랑스 중부와 서부를 다스리게 되어 프랑스 왕실보다 더 큰 힘과 더 넓은 영토를 갖게 되었다. 결국 이 문제는 200년 후에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일어나는 백년 전쟁의 불씨가 된다. 또한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에서는 다양한 사법체계의 개혁을 추진해 잉글랜드법의 초석을 마련해 왕실의 재정과 통화, 조세제도를 정비했다. 그러나 그는 막내의 아들인 존을 과도하게 편애해, 장대한 세 아들에게 상속을 결정했지만, 왕위와 권력에 집착해, 여성의 편력도 깊고 왕비와의 관계도 좋지 않았다. 1170년 공동왕으로 임명된 2남 헨리(청년왕 Henry the Young, )가 1173년에 반란을 일으키면, 왕비 엘레오놀은 리처드까지 부추겨지고 그 후 4남 제프리 Geoffrey II of Bretagne(11) 퇴위까지 1174년까지 이어진 반란은 지역 영주들의 협력하에 진압되었지만 갈등은 그 후에도 지속되었다. 두 번째 반란은 헨리와 리처드가 어머니의 영지인 아키텐을 둘러싸고 싸움을 펼치면서 1181년에 시작되었지만, 에 헨리가 급사해 종결했다.
그러나 상속 문제에 의한 갈등은 변함없고, 1189년에는 아들 리처드가 프랑스의 필리프 2세와 연합해 반란을 일으켜 아쉬웠던 막내 아들 존마저 리처드 측에 가담하자 충격을 받고 헨리 2세는 전의를 상실해 그 해의 시농성에서 타계.
a3) 루이 7세와 노트르담 대성당 엘레오놀과 이혼한 루이 7세는 3번째 결혼을 통해 유력한 귀족인 산파뉴 백작과 브루아 백작과의 죽음으로 이어져 프랑스 동부 지역을 지배하게 되어 2차 십자군 전쟁에도 참가해 위대한 존엄왕으로 칭찬받는 아들 2세 3세. 한편, 1012세기에 들어서 프랑스 남부 지방에서는 로마네스크 Romanesque 양식의 심플하고 엄격한 형태의 대성당 또는 수도원 건물이 세워졌지만, 북부 지방에서는 고트족 양식이라는 의미의 고딕 고딕 양식의 건축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고딕 대성당 건축의 시작은 참수된 후 자신의 머리를 들고 찬송가를 부르며 걸었다는 도니 어른 Saint Denis를 추모하는 산드니 대성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딕 양식의 대성당 건축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팔리시테 섬의 노트르담 대성당 Cathédrale NotreDame de Paris라고 한다. 노트르담이란 성모 마리아라는 의미이며, 루이 7세의 치세인 1163년에 기공식이 열렸고, 당시 교황 알렉산더 3세가 축성을 해 주었다. 처음에는 건물 중앙의 바디 부분을 먼저 세우고, 날개 부분인 트랜스셉트 transept를 차례로 세웠다. 1260년에 1차 완공이 되었지만, 전체적인 완공에는 20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대성당을 비롯한 고전 건축에서 서양인의 인내는 정말 훌륭할 정도다. 우리나라라면 12년, 길고 10년 이내에 모두 지어 버린 건축물의 건축기간이 적어도 50년부터 100년, 심지어 200년 이상이 걸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물론 건축의 재료가 돌이라는 가공하기 어려운 재료라는 측면도 있지만, 그만큼 단정과 공을 가진 건축이기 때문에 지금도 위용을 자랑하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경외심이 있다. 불행히도 노트르담 대성당은 2019년에 발생한 대화재 14를 위해 보수 공사 중이며 2022년 현재 그 거룩한 모습을 제대로 관람하기가 어렵다. 이른 시기에 복구가 이루어지길 바라는 바나 지금까지의 경과나 역사적인 추이를 볼 때 언제쯤 완공될지는 미지수다.
a4) 영국 사자왕 리처드와 현지왕 존 a) 사자왕 리처드 Richard I the Lionheart 필리프 2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안주 제국 앤지빈 엠파이어의 사자왕 리처드 1세와 함께 3차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지만 엄청난 영토 분쟁으로 반목하고 있던 동료인 이들은 원정 도상에서도 다툼이 일어나 필리프는 치부했다. 결국 남은 리처드 1세는 단독으로 아이유브 왕조의 영웅 살라딘과 1년간 싸웠지만,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정복할 수 없었고, 십자군의 아크레 소유권 인정과 비무장 기독교 순례자의 예루살렘 방문을 허락한 조건 하에서 3년간의 합세 히 6세와 결탁해 리처드의 동생 존의 왕위 찬부음모를 지원했다. 이를 알게 된 리차드는 서둘러 귀환하고 있던 도중 폭풍으로 배가 난파되어 베니스 부근의 해변에 상륙해 변장을 하고 신분을 위장해 육로를 통해 잉글랜드로 향했지만, 에 비엔나에서 오스트리아 공작에 잡혀 들슈타인 성. 이때 왕제의 존은 리차드가 사망했다고 공표해 왕위에 오르려고 했지만 영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포기했다. 1193년 리처드의 신병은 레오폴트 5세에서 하인리히 6세로 양도되어 필리프에게 건네주는 협박에 굴복하고 터무니없는 조건을 모두 받아들여 15만 마르크라라는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는 동시에 왕국 전체를 신성 로마 제국에 양도했다. 존과 필리프는 리처드의 석방을 늦추고 하인리히와 협상을 했지만, 결국 리처드는 에 해방되었다. 리차드는 석방된 뒤 영국으로 돌아와 존을 굴복시켜 왕권을 회복했지만 한 달도 지나기 전에 다시 캔터베리 대주교 휴버트 월터에게 대리 청정을 맡긴 후 필리프 2세와의 전쟁을 위해 프랑스로 떠났다. 결국 그는 1199년 리모주 자작령의 샤류성을 공격하고 있는 동안 크로스보우에 닿아 전사했다. a) 실지왕 존 John the Lackland of England 5~12
a6) 루이 9세 Louise IX(성왕 루이, 산루이 Saint Louis, )
루이 8세가 짧은 통치를 마치고 타계하려고 왕위를 계승한 루이 9세(, 재위 )대로, 카페 왕조는 최전 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푸와시 Poissy에서 루이 8세와 신앙심이 깊은 어머니 카스티야의 브란슈 Blanche de Castille의 아들로 태어난 루이 9세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라며 1226년에 아버지가 떠나자 12세의 어린 나이. 1234년 프로방스 공작 레몬드의 딸인 마가리타와 결혼하여 10명의 아이를 두었다. 그는 두 번째 그리스도로 숭배받는 성 프란체스코에 감화하여 절대적으로 푸른 하늘의 삶을 실천하려고 했고, 빈민들과 식사를 하고 한센병 환자와 맹인을 돕는 시설 QuinzeVingt를 세웠다. 한편 외로운 기독교 정신에 충실하고 종교 법원을 설치하고 이단에 낙인을 치른 알비파를 탄압하고 1254년에는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다. 또한, 그는 두 번에 걸쳐 이집트, 모로코. 예루살렘 등에 십자군의 원정을 떠나 결국 1270년에 튀니스로부터 전염병에 병사를 두고, 그 유해는 샌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할아버지의 필리프 2세가 프랑스 영토의 확대를 이루었다면 카페 왕조의 가장 위대한 군주로 칭찬받는 루이 9세는 그 성과를 바탕으로 법원과 고등법원을 설치하는 등 사법권의 확립을 통한 대내적 안정을 도모하고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프랑스는 사회 전역에서. 그는 중재와 협상을 통해 평화적인 방법으로 영토 확장에도 힘써 파리조약으로 아키텐의 일부인 가스코뉴를 영국령으로 내주면서 헨리 3세에서 충성서약을 받아내고 영국 왕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위대한 기사이자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은 그는 사후 성자로 추측되어 성왕 성왕 루이, 산루이 Saint Louis라고 불립니다. 성왕 루이가 남긴 중요한 종교적인 유산으로는 파리 시테 섬의 왕실 예배당 산토 샤펠 Sainte Chapelle과 예수의 가시가 있는 크라운 오브 토론이 있다.
제4차 십자군 전쟁 당시 비잔틴 제국을 도우러 갔던 십자군이 탈선해 비잔틴 제국을 공격해 점령하여 라틴 왕국을 세우고 통치하고 있었지만, 재정이 어려워지면 제국의 국보인 가시가 있는 왕관을 담보함으로써 베네치아 은행으로부터 대출된다. 이를 알게 된 성왕 루이가 거금을 지불하고 이 가시관을 파리에 가져와 산토 샤펠이라는 예배당을 세우고 여기에 잠시 보관했다. 함께 데려간 가시관에서 벗어난 가시는 프랑스 국왕이 충성을 바친 신하들에게 선물로 주어졌으며, 그 중 하나 The Holy Thorn Reliquary가 현재 영국 박물관 The British Museum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한편, 그 가시관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를 거쳐 다양한 장소를 전해 1806년부터 노트르담 대성당에 보관되고 있다. 2019년 노트르담 대성당에 큰 화재가 발생했을 때 소방관들은 긴급 매뉴얼에 따라 이 성물에서 꺼냈다고 한다. a7) 미남왕 필리프 4세 Philippe IV와 아비뇽의 유수 유죄 성왕 루이 9세의 지세 이후 그의 아들의 대담한 왕 필리프 3세와 손자의 미남왕 필리프 4세 필립 IV세에 도달해 수도 파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구가 늘어나 서서히 귀족의 지배에서 벗어나 부유한 생활을 누리는 자유로운 도시민을 의미한다. 필리프 3세 Philippe III는 대담왕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툴루즈와 포와투에 남아 있던 영국령을 점령하고, 가스코뉴를 제외한 프랑스 내 영령을 모두 수령했다. 그의 아들인 미남왕 le bel Philippe 4세 Philippe IV(, 제위 )는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도 대담하게 하고 왕권의 강화 때문에 전쟁도 불사가 되어 교황청과도 대항해 싸웠다. 그는 플랑드르 백국 Comtede Flandres(프랑더스 개라는 동화로 유명한 장소로 현재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로 나뉘어졌다)와 아키텐 공국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영국의 에드워드 1세와 대항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재정이 가난해지면 전비를 충당하기 위해 화폐를 새롭게 주조하고(조선말 고종 시흥선대원군 당백전을 생각해 보자) . VIII가 필리프 4세를 파문하는 철서를 발표했다. 그러자 필리프 4세는 국왕의 허락 없이 교황청에 자금을 보내는 것을 금지시켜 대결을 하는 것도 부족해 교황의 칙사를 체포해 재판에 건네주고, 유죄 판결을 내려 갈등이 높아졌다. 격노한 교황이 철서를 보내오자 궁정에서 불타버린 그는 교황과의 싸움에서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사제·귀족·부르주아 대표로 구성된 삼부회 삼부회를 소집했다.
첫 시기는 약 70년간 계속되어 모두 7명의 프랑스인 교황이 잇달아 옹립되었지만, 교황청을 다시 로마로 이전해야 한다는 여론이 유럽사회로 철퇴하자,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1377년에 로마에 교황청을 이전해 아비뇽 유수가 끝났다.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우산 드라이브코스 - 경상남도의 볼거리 (1) | 2025.03.25 |
---|---|
양평 쉐르빌온천 - 양평 쉘빌 온천 관광 호텔 패밀리 스위트룸, 그랜드 트윈룸 (리버뷰) 이용후기, 트레일, 편의 시설, 온천 (0) | 2025.03.25 |
기장 회센터 - 호행 부부 외사 마을 동생과 부산여행 2일차/카쿠사 선물, 연말 선물, 광안리회 센터에서 회장, 민악회 타운 추천 상회, 기장 오션뷰 카페 메이크업씨, 기장 일몰 명소 이동항 (0) | 2025.03.25 |
고성오일시장 식당 - 시로야마 고추를 제대로 맛볼 수있는 맛있는 네 (0) | 2025.03.25 |
양평 막걸리축제 - 경기도의 볼거리 양평막걸리 마을 축제 숨겨진 핑크 뮬리스팟 입장료 체험 (0) | 2025.03.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