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반적으로 전통사찰로 내거는 절 중에는 신라나 고려시대에 창건된 1천년 전통사원이라는 경우가 보인다. 건축시기가 명확하고 예술성 등이 뛰어난 사원의 건물은 보물로 지정되기도 하지만, 화성시의 용주사 대웅보전은 단청이 화려하고, 공포가 매우 정교하고 보물로 지정된 사례를 들 수 있다. 사원의 유명한 승려들을 기리며 부도와 사원의 역사를 비문에 남기거나 탑을 세우는 경우에는 그 역사성을 고증할 수 있다. 정확한 제작시기를 기록으로 알 수 있는 경우에는 작은 규모의 탑에서도 보물로 지정되기도 한다. 양양 낙산사 7층 석탑도 제작 시기를 알고 보물로 지정되었지만 낙산사 대화재 불이나 녹아버린 낙산사 보물종은 보물 해제되어 똑같이 복원된 종은 보물로 지정되지 않았다. 절의 유명했던 스님들은 부도탑과 비석을 세우고 그 의지를 기리는데 강남봉은사에 있는 청호도 스님의 부도와 공적비의 경우 을축대홍수(1925년) 때 수백 명을 구한 스님의 공덕을 기리는 것이다. 한 마디에는 절의 역사와 유명승님의 부도와 공덕비를 비석 등에 새겨 남기는 경우가 있지만 경기도의왕의 청계산 청계사·무도군과 승려공덕비, 청계사 사적비를 예로 들 수 있다.
요전날 방문한 청계사에는 사원 경내에서 높은 돌 계단에 오르는 입구 오른쪽에 조성된 무도군, 공적비, 사적비가 보인다. 일부러 자세히 들여다 보면서 일일이 사진을 찍었다.
사원 입구에는 2014년 경기도 종류문화재로 지정된 청계사 사적기석과 2014년 경기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된 청계사 중재 숙공사당 기념비가 있습니다.
趙貞肅公祠堂 기념물 이 비는 고려시대 1341년에 건립된 것으로 현재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12번지 청계사 경내에 위치하고 있다. 높이 177cm, 폭 48cm, 두께 18cm로 철자는 이곡, 문자는 왕수성이 썼다. 이 비의 전면에 비명인 조정가공당 기비가 새겨져 있어 비문과 같은 내용이 이 비의 철자인 이곡의 문집가정가에도 실려 있다. 은규의 일대기를 적어 마지막 부분에 청계사를 세우게 된 경위를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비고 설명문)
《비문에 대한 설명판의 설명문 전문》
한 줄에 지어진 조정안 공사당 기비(오른쪽), 청계산 청계사적(중앙), 청계사적비(왼쪽)보다 한층 높게 조성되어 앞줄은 부도하고, 후열은 공덕비는 나란히 배치되었지만 모두 5명의 대사. 비석에는 각각 ‘경기당 성우 대종사 비명, 만공당 월면대 종사 비명, 보월당 성인 대통령 선거 비명, 김오단 태전 대종사 비명’ 송림당 월산 대종사 비문과 쓴 문자 제목 아래 한국문 혼용으로 오분 스님들의 공적을 새겼다.
2004년에 조성된 무도탑비 설계자는 홍광표 교수(동국대)이며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법장은 부도군의 조성 경위에 대해 한국 선불교 의 큰 산맥들 때문에 꼭 이번 무도탑 비조성이 대통령 선수들의 사상과 정신, 전통을 고스란히 담은 대작 불사에 원활하게 회향될 것이라고 믿는다”고 축하했다. 5명의 승려의 공덕비의 상세는 사진으로 소개하는 것으로 대용한다
청계사가 한국선불교 중흥본찰로서의 면모를 새롭게 일신한다 청계사는 경내에 한국선불교의 중흥조인 경학대선사와 덕산을 중심으로 선풍을 날려버린 만공 대통령, 다수의 후학 제휴를 받았다. 대통령 선거, 현대 한국선의 거봉으로 타락하는 월산 대통령 선거 등 네 선사자의 부담과 공적비를 조성한다. 이들 4명의 선사는 재세 때 청계사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법보신문, )
한편 의왕 청계산 남쪽에 위치한 청계사는 연산군이 사찰 폐쇄령을 내렸을 때 봉은사를 대신해 선종의 본찰 역을 완수했다.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이 되고 있다. 용주사는 경기도 화성시에 정조대왕의 위패를 모신 사찰이다.
《청계사, 선종본찰의 역할》 조선 건국 이후 1407년(태종7) 12월 청계사는 천태종 자복사국 안녕과 고후의 복을 빌리기 위해 지정된 사원으로 지정되었다. 1503년(연산군 9) 연산군이 도성내 사원의 폐쇄령을 내렸을 때 이 절은 봉은사를 대신하여 로종 본찰의 역할을 했다. 1689년(숙종 15) 3월에 화재로 대부분의 건물이 타오를 때 승려성희가 중건되어 그 내력을 정리해 청계사 사적비를 세웠다. 1876년(고종 13) 에 화재로 수십곳의 건물이 소실되면 4년 후인 1879년에 스님의 오토야가 중건되었다. (중부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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